본문 바로가기
생각

영화 '하녀' 뒤늦게보다.

by 슈슈뱀 2010. 7. 6.
반응형

뒤 늦게 하녀를 봤다. 김기영 감독의 원작을 이미 봐왔던 터라 리메이크 소식에 큰 기대를 안했다. 특히 임상수 감독이 만든다기에 여론의 평가는 안봐도 비디오라고 생각을 했다. 그의 작품이라면 분명 욕 먹을테니까.



하녀의 오프닝이다. 산업 곳곳에 여성의 참여가 높아지면서 일하는 여성도 많이 늘었다. 오히려 남자들의 입지가 좁아졌다는 얘기도 나오고있다. 영화에서는 위 사진처럼 여성들이 다양한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감독은 이들을 신시대의 새로운 하녀로 정의 내리고 있다. 위 사진을 보자. 영화의 시선은 열심히 일하는 여성을 보여주고 그들의 뒤에는 희희낙락거리는 젊은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사회의 중요한 역할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대신해 더럽고 지저분한 일을 도 맡아하는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전히 여성은 이 사회에서 차별 받는 존재인 것이다.



은이라는 인물은 원작에서도 그렇지만 좋게 말하면 순수한 것이고 솔직하게 말하면 바보다. 부모가 일찍 죽어 마땅한 돌봄도 없이 방치되버린 말 그대로 야생 그자체로 살아온 소외된 계층이다. 그래서 은이는 정이 많고 정을 그리워한다. 감독은 그런 은이의 심성을 말하듯 위 장면 처럼 두 고양이를 배치시켜 보여주고있다. 은이를 보살펴주는 친구는 세상의 더러운 꼴을 다 보고 살았는지 그의 몸뚱이처럼 세상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은이에게 닥친 불행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치부해 버릴 정도로 그는 냉소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인지 그녀의 자리에는 검은색 고양이가 창 밖을 보며 한가로이 앉아있다. 좀 더 많은 세상살이를 격은 그의 찌든 마음과 그로 인한 삶의 체념을 보여 주듯 말이다. 한편으로 은이에게 제 2의 부모처럼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듯이 베개 또한 커다랗게 설정해 놨다. 한편 은이 자리에 있는 고양이는 어떠한가 흰 고양이가 당장이라도 집 밖으로 뛰처나가려고 서있다. 그리고 작은 베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아직 은이는 순수하고 아직 세상을 모르며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 같다는 그런 시선 말이다.


은이가 이정재의 집에 처음 들어가서 서우의 발에 메니큐어를 칠하며 나오는 장면이다. 서우가 읽고있는 것은 하녀라는 제목의 책이다. 표지에 그려져있는 여자의 얼굴이 서우와 닮지 않았나? 문제 제기를 위한 감독의 재미있는 발상이다.


이정재의 가족과 짧은 휴가를 갔을 때 은이는 불륜 관계에 빠진다. 그 이후 감독은 서우가 제2의성을 보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은이가 여성으로서 한 사회의 독립적 인격체로서 존재할 수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듯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갈등의 시작으로 들어가는 시점에 카메라는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 속에 무성한 나무에서 초라한 몇그루의 나무로 시선을 이동시킨다. 이 것은 앞으로 은이에게 닥칠 불행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은이의 죽음을 예고 하듯 까마귀 울음 소리가 스산하기까지하다.


이정재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은이에게 점점 불행의 그림자가 다가온다. 그래서 감독은 이 장면에서 은이가 앞으로 임신을 하고 비극을 맞을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위의 많은 아기 인형들을 보자. 그것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지만 실제가 아닌 허상이다. 그 반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아이는 실제이다. 존재 했지만 가질 수 없는 실제 했지만 타인에 의해 아닌게 되는 은이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은이는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준다. 어느 엄마가 아이를 살리기 위한 애끓는 모정을 표현하고 있다. 은이가 그랬던 것 처럼...


은이는 이정재와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 들였지만 결국 그에게 돌아온건 화대뿐이었다. 이런 시선은 영화 후반 은이의 낙태 사실을 알고 난 후 이정재가 장모에게 당신의 딸이 낳은 애기만 내 아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에서 보듯이 여성은 아직도 남성을 위해 존재하고 남성의 전유물로서만 가치가 있다고 얘기하고 있다. 결국 제2의성을 보여주며 던젔던 질문의 답치곤 너무 현실적인가? 아니면 또다른 질문인가? 어쨌든 빨리 빨리 넘어가자.. 갈길이 멀다.


은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된 그들은 강제로 낙태를 시킨다. 은이는 이런 상황이 많이 혼란스럽고 자신이 모자란 탓이라는 듯 체념하는 듯하다. 짧은 시간 너무 세상의 더러움을 많이 겪어서인지 여전히 친구는 따뜻한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고 여유가 있는 반면 은이는 넓은 베개에 누워서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춥고 외로운 어둠 사이에서 그의 심리적 혼돈을 표현하듯 창밖에서 어지러운 네온사인 불빛만이 은이를 감쌀 뿐이다.


은이는 복수를 결심하고 이정재의 집으로 찾아간다. 이정재에 사랑을 느꼈을 당시 여자이고 싶어 곱게 화장을 했지만 이번에는 한 여자로서 곱게 화장을 하고 찾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은이를 그저 귀찮은 존재처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이 장면이 재미있는건 은이가 마치 성녀처럼 표현 되있다. 그들은 지옥에 사는 마귀라도 되는 듯 말이다.


마지막 엔딩이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이정재의 가족은 화목하다. 고가의 미술작품을 아이에게 선물하며 그들은 행복해한다. 아이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다시 첫장면으로 돌아가자. 왜 안끝내고 다시 가냐고? 결말을 알려면 영화 오프닝으로 돌아가야한다. 영화의 오프닝은 영화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이다. 위 장면은 영화 시작에서 한 여인이 자살하기 위해 난간을 넘어가는 모습이다. 은이의 죽음을 암시함과 동시에 막다른 길에 다다를 은이의 모습을 난간에 서있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사람이 떨어저 죽었지만 주변의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 또는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시체 옆에서 한무리의 여성들이 웃고 떠들고 있기도하다. 이것은 이 사회에서 여성이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존중 받지 못하고 남자에 의해 소비되는 여성들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마지막 영화 엔딩 장면을 다시 보자.


남자에 의해서 비극이 일어났고 남자에 의해서 여성은 행복을 찾았다. 위 장면처럼 남성에 의해 여성의 삶과 존재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의 여성의 삶이란 밑바닥 인생 말 그대로 하녀 라고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임상수 감독이 예전에도 그랬지만 특정 계층의 추찹한 면을 과장되게 끄집어내 사회 문제를 비꼬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 역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바람피운 능력 좋은 남자에게 빌어 붙어 사는 서우와 장모의 모습은 일반적인 여성의 모습이고, 자신의 생각대로 복수를 다짐하는 은이는 남성으로 부터 길들여지길 거부하고 주체성을 찾으려는 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어쨌든 뒤늦게 쓴 리뷰라면 리뷰고 그냥 끄적여봤다. 그리고 제발 감독 성향이나 작품 세계는 알고 보자. 마케팅에 혹해서 실망하지 말고...



반응형